어쩔 수가 없다 리뷰 총정리 (구조조정, 자기합리화, 이병헌)
요즘 볼만한 한국 영화가 없다는 말을 주변에서 정말 자주 듣습니다. 저도 비슷한 생각을 하던 차에 극장에 발을 들였다가 예상보다 훨씬 강렬한 경험을 하고 나왔습니다. 연상호 감독의 신작 군체, 칸영화제 공식 초청에 실시간 박스오피스 1위까지 기록하며 화제를 모은 작품인데 직접 보고 나니 그 이유가 분명히 느껴졌습니다.
영화관 불이 꺼지고 나서 처음 든 생각은 "이 좀비들, 뭔가 다르다"였습니다. 기존 좀비 영화에서 감염자들은 본능만 남은 존재였습니다. 달리거나 비틀거리며 가까운 것에 무작정 달려드는 단순한 위협이었죠. 그런데 군체의 감염자들은 처음부터 달랐습니다. 처음엔 사족보행으로 기어다니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이족보행으로 일어서고, 급기야 사람과 사진을 구별하기 시작합니다. 이걸 보는 순간 등골이 오싹해졌습니다.
이 설정의 핵심은 균사체(菌絲體)입니다. 균사체란 곰팡이나 점균류가 실처럼 가늘게 뻗어 형성하는 구조물로, 개체 간 정보와 영양분이 흐르는 통로 역할을 합니다. 영화 속 흰색 점액질이 바로 이 균사체를 시각화한 것인데, 감염자들이 이 네트워크를 통해 서로가 보고 듣고 학습한 정보를 실시간으로 공유하게 됩니다. 한 마리가 인간을 식별하는 방법을 터득하면, 연결된 모든 개체가 동시에 그 능력을 갖추는 구조입니다.
이 설정은 순전히 영화가 만들어낸 허구가 아닙니다. 영화 속 대사에도 등장하는 황색망사점균(Physarum polycephalum)은 실제로 존재하는 생물입니다. 황색망사점균이란 뇌도 신경도 없지만 스스로 최적 경로를 탐색하는 능력을 가진 점균류 생물입니다. 2000년 나카가키 도시유키 연구팀이 미로 실험을 통해 이 생물이 불필요한 이동 경로를 스스로 제거하고 최단 경로만 남긴다는 사실을 학술적으로 증명했습니다. 이 연구 결과는 과학계에서 집단지성의 대표적 사례로 손꼽힙니다(출처: Nature, 2000). 영화가 이 실제 논문을 설정의 근거로 삼았다는 점에서, 단순한 공포 오락물과는 차원이 다른 깊이가 느껴졌습니다.
군체의 감염자들이 기존 좀비와 다른 점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제가 영화를 보면서 가장 소름 돋았던 순간은 좀비들이 불빛을 끄자 멈추는 장면이 아니라, 잠시 후 그 유인책을 학습하고 무효화해버리는 장면이었습니다. 이 생물은 이미 우리가 상상하던 좀비가 아니었습니다.
연상호 감독은 이전 작품들에서도 공간을 영리하게 활용해왔습니다. 부산행은 달리는 기차라는 밀폐 공간 안에서, 반도는 고립된 한반도라는 광활한 공간에서 이야기를 펼쳤습니다. 군체는 그 공식을 수직으로 세웠습니다. 서울 도심의 초고층 빌딩 하나. 탈출하려면 올라가야 하고, 때로는 다시 내려와야 합니다. 층마다 마주치는 상황이 달라지고, 좀비들의 진화 수준도 달라집니다.
제 경험상 이 수직 구조가 단순히 스릴을 높이는 장치가 아니라 이야기의 핵심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층을 이동할 때마다 감염자들의 행동 패턴이 달라지는데, 그것이 좀비진화의 속도를 체감하게 하는 장치로 작동합니다. 처음엔 빛만 보고 달려들던 개체들이 나중엔 미끼와 실물을 구별하고 문을 부수는 방법까지 학습합니다. 공간을 이동할수록 공포의 질이 달라지는 구조입니다.
생존자 캐릭터들도 인상 깊었습니다. 특히 휠체어를 탄 현이와 생명공학과 교수 권세정의 관계는 단순한 조력자 구도를 벗어납니다. 자신이 가장 불리한 처지임에도 자신의 휠체어를 기꺼이 미끼로 내놓는 현이를 보면서, 이 영화가 단순히 생존 스릴러가 아니라는 걸 다시 확인했습니다. 제가 직접 보고 나서 든 생각은 이 영화의 진짜 주인공은 좀비 떼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다만 솔직히 한 가지 아쉬움이 남기는 했습니다. 점점 강해지는 감염체를 직접 정면으로 대적하는 강렬한 인물이 없다는 점입니다. 생존자들이 회피와 지혜로 버티는 과정 자체가 이 영화의 테마와 맞닿아 있다는 건 알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압도적인 위협 앞에서 맞서는 캐릭터가 한 명쯤 있었으면 또 다른 카타르시스가 생기지 않았을까 싶기도 했습니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 한참 자리를 못 뜨게 만든 건 앤트밀(Ant Mill) 이야기였습니다. 앤트밀이란 선두 개미가 자신이 남긴 페로몬 흔적과 만나면서 개미 무리 전체가 원형 루프에 갇혀 탈출 신호 없이 계속 맴돌다 지쳐 죽는 현상을 말합니다. 감독은 이 장면을 통해 현재 우리 사회를 비추려는 것 같았습니다. 알고리즘과 인공지능(AI)으로 더 빠르게 연결되고 있지만, 정작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는 집단 전체가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건 제가 영화 내내 느꼈던 감각과 정확히 일치했습니다. 군체의 감염자들은 무섭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들의 집단 행동 방식이 우리가 소셜 미디어 피드를 소비하는 방식과 구조적으로 닮아 있습니다. 분산형 네트워크(Distributed Network)란 중앙 제어자 없이 개체들이 서로 연결되어 정보를 주고받는 구조를 말합니다. 영화 속 감염자들이 바로 이 분산형 네트워크로 움직이는데, 그게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연상호 감독은 이 작품에서 생물학적 테러리즘(Bioterrorism)이라는 소재를 활용했습니다. 생물학적 테러리즘이란 바이러스나 균류 같은 생물학적 병원체를 의도적으로 살포해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는 행위를 뜻합니다. 서영철이라는 인물이 체인스 바이오에서 자신의 연구를 탈취당한 뒤 빌딩 전체에 감염체를 풀어놓는 설정이 이에 해당합니다. 단순한 악당이 아니라, 인류를 다음 단계로 진화시키겠다는 기괴한 신념을 가진 인물이라는 점에서 더 소름 끼쳤습니다. 실제로 생물테러와 관련한 국제 대응 체계는 세계보건기구(WHO)가 지속적으로 연구하고 있습니다.
부산행을 재미있게 봤던 분이라면 군체는 한 단계 더 나아간 작품임을 금방 체감하실 겁니다. 제가 직접 보고 나서 느낀 건, 이 영화는 좀비가 무서운 영화가 아니라 연결이 무서운 영화라는 것이었습니다. 전지현, 구교환, 지창욱, 신현빈, 김신록, 고수까지 사실상 전원 주연급 배우들이 한 공간에 모여 경쟁하듯 연기를 펼치는 장면들은 스크린에서 봐야 제 맛입니다.
영화를 다 보고 나왔을 때 가족에게 바로 추천 문자를 보냈습니다. 무섭냐고 물어보신다면, 무섭긴 한데 생각할 거리도 충분히 많은 작품이라고 답하고 싶습니다. 스릴러 장르로 포장되어 있지만 그 안에 사회와 인간 집단에 대한 시선이 담겨 있습니다. 한국 영화가 오랜만에 제대로 된 방향을 제시한 느낌이었습니다. 아직 못 보셨다면 가능한 큰 스크린에서 보시길 권합니다.
--- 참고: https://youtu.be/Y6RI7hdc2Jo?si=e46Kwwt7wl6j2Hb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