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쩔 수가 없다 리뷰 총정리 (구조조정, 자기합리화, 이병헌)
영화가 끝났는데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한 적이 있으신가요? 저는 '조디악'을 보고 나서 처음으로 그런 경험을 했습니다. 엔딩 크레디트가 다 올라가도록 멍하니 앉아 있었는데, 속이 시원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허무하지도 않은 이 이상한 감정이 집에 돌아가는 길 내내 이어졌습니다. 1960년대 후반 미국 캘리포니아를 공포로 몰아넣은 실존 연쇄살인마 조디악(Zodiac)의 이야기를 다룬 이 영화, 단순한 범죄 스릴러로 넘기기엔 뭔가 다른 게 있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이 영화를 보면서 "범인이 누구야?"라는 질문에 집중합니다. 저도 처음엔 그랬습니다. 그런데 영화가 2시간을 넘어가는 시점부터는 이상하게도 조디악 자체보다 그를 쫓는 사람들의 얼굴이 더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San Francisco Chronicle) 신문사의 만화가 로버트 그레이스미스(Robert Graysmith), 형사 데이브 암스트롱(Dave Armstrong), 기자 폴. 이 세 사람은 저마다 다른 이유로 조디악을 쫓습니다. 암스트롱 형사는 직업적 의무감으로, 기자 폴은 명성과 개인적 이득을 위해, 그리고 그레이스미스는 순수하게 정의를 위해서입니다. 처음에는 모두 비슷해 보이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 동기의 차이가 각자의 삶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갈라놓습니다.
프로파일링(Profiling)이라는 수사 기법이 있습니다. 범행 패턴과 심리를 분석해 용의자의 특성을 좁혀가는 방식으로, 쉽게 말해 '범인의 내면을 역추적하는 작업'입니다. 영화에서 형사들이 조디악의 편지 필체를 분석하고, 다리를 저는 신체적 특징을 추적하며, 암호를 해독하는 장면들이 바로 이 프로파일링의 과정입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엔 이 영화는 조디악을 프로파일링하는 동시에, 관객으로 하여금 쫓는 자들을 프로파일링하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특히 데이비드 핀처(David Fincher) 감독은 조디악의 살인 장면을 자극적으로 연출하는 대신, 무기력하게 쌓이는 시간과 흐트러지는 일상으로 공포를 표현합니다. 이건 솔직히 예상 밖이었습니다. 첫 살인 장면이 어둡고 빠르게 처리되는 반면, 형사들이 서류를 넘기고 전화를 기다리는 장면들은 묘하게 길게 느껴집니다. 그 리듬 자체가 이미 메시지였던 셈입니다.
여러분은 무언가에 너무 깊이 빠져들어서 정작 중요한 것들을 놓친 적이 없으신가요? 저는 있습니다. 예전에 하나의 프로젝트에 집착하다 보니 어느 순간 주변 사람들과의 약속을 자꾸 미루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의 감각이 로버트 그레이스미스를 보면서 정확히 되살아났습니다.
그레이스미스는 신문사 만화가입니다. 수사 권한도 없고, 전문 교육도 받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누구보다 집요하게 조디악을 추적합니다. 문제는 그 집요함이 미덕으로만 그려지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아내와 멀어지고,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사라지고, 집 안에는 조디악 관련 자료만 쌓여갑니다. 이 장면들이 불편하면서도 공감이 가는 이유는, 우리 모두 어느 정도는 '집착의 문턱'을 경험해봤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강박적 집착(Obsessive Fixation)이란 특정 대상이나 목표에 대한 사고가 반복적으로 침투해 일상 기능을 방해하는 심리 상태를 말합니다. 그레이스미스의 변화는 영화 내내 이 과정을 시각적으로 보여줍니다. 처음에는 취미에 가까웠던 관심이 어느 시점을 지나면 의무처럼 변하고, 결국 정체성이 되어버립니다. 그리고 그 단계에서는 멈추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집니다.
조디악 사건을 둘러싼 사람들의 변화를 정리해보면 이렇습니다.
이 세 가지 결말이 보여주는 것은 단순합니다. 진실을 쫓는 방식과 이유가 결국 그 사람의 운명을 결정짓는다는 것입니다.
영화 결말에서 그레이스미스가 유력한 용의자 아서 리 앨런(Arthur Leigh Allen)과 마주치는 장면, 혹시 기억하시나요? 큰 액션도 없고 대사도 거의 없습니다. 그저 서로의 눈을 바라볼 뿐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 장면에서 영화 전체를 통틀어 가장 강한 긴장감을 느꼈습니다. 화려한 연출이 없어서 오히려 더 무서웠습니다.
미제사건(Cold Case)이란 수사가 종결되지 않은 채 장기간 미해결 상태로 남아 있는 사건을 의미합니다. 조디악 사건은 그 대표적인 예로, 실제로 FBI 공식 자료(출처: Federal Bureau of Investigation)에 따르면 조디악 킬러는 공식적으로 최소 5명을 살해했으며, 37명을 살해했다고 자신이 주장했지만 신원은 끝내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2004년 샌프란시스코 경찰국이 공식적으로 수사를 종결한 것도 영화의 마지막 자막으로 그대로 등장합니다.
아서 리 앨런은 생전 가장 유력한 용의자였습니다. 범행 수법, 심리적 성향, 신체적 특징, 심지어 달린 페린(Darlene Ferrin)의 집과 불과 45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거주지까지, 우연이라고 보기 힘든 요소들이 겹쳤습니다. 아서가 성범죄 혐의로 교도소에 수감된 기간 동안 조디악의 활동이 멈췄다는 사실도 무시하기 어려운 정황이었습니다. 그러나 2002년 조디악의 편지에서 추출한 DNA가 아서와 일치하지 않았고, 아서는 회의 직전 심장마비로 사망해 법적인 기소 자체가 불가능해졌습니다.
제가 이 부분에서 가장 크게 느낀 것은 '법적 증거(Legal Evidence)'와 '심증(Circumstantial Evidence)'의 간극이었습니다. 법적 증거란 법정에서 유죄를 입증할 수 있는 객관적이고 직접적인 자료를 말하고, 심증은 논리적으로 범인일 가능성이 높다는 추론에 그치는 상태입니다. 영화는 끝까지 심증만 쌓일 뿐 법적 증거로 연결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답답함이 바로 현실입니다.
솔직히 처음 엔딩을 봤을 때는 허무했습니다. 이렇게 긴 시간 동안 쫓고 또 쫓았는데, 결국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채 영화가 끝나버리다니. 그런데 집에 가는 길에도 영화 생각이 계속 났고, 다음 날 아침에도 "만약 아서가 진짜 범인이었다면?"이라는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이 여운 자체가 영화의 의도였다는 걸 그제야 알아챘습니다.
내러티브 클로저(Narrative Closure)란 이야기가 관객에게 명확한 결론과 해소감을 제공하는 구조를 말합니다. 대부분의 범죄 스릴러는 이 내러티브 클로저를 충실히 이행합니다. 범인이 잡히거나, 반전이 밝혀지거나, 피해자가 복수에 성공하는 방식으로요. 그런데 '조디악'은 의도적으로 이 구조를 거부합니다. 제 경험상 이런 결말을 선택하는 건 감독 입장에서 꽤 부담스러운 결정입니다. 관객의 만족감을 포기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데이비드 핀처가 이 선택을 한 이유는 분명해 보입니다. 조디악 사건은 실화이고, 실화에서는 억지로 만든 결말이 오히려 모욕이 될 수 있습니다. 로튼 토마토(출처: Rotten Tomatoes)에서 89%의 신선도를 기록한 이 영화가 평단에서 높은 평가를 받은 이유 중 하나도 바로 이 정직함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아쉬운 점이 없진 않았습니다. 러닝타임이 160분에 달하고 등장인물도 상당히 많아서, 중반부에는 집중력이 흐트러지는 구간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처음 보는 분들은 캐릭터를 구분하는 데 시간이 걸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후반부에 모든 조각이 맞춰지는 과정을 경험하고 나면, 초반의 느린 호흡도 충분히 납득이 됩니다. 오히려 그 느림이 없었다면 마지막 장면의 무게도 달랐을 겁니다.
Q. 영화 조디악의 실제 사건은 어떻게 마무리됐나요?
A. 실제 조디악 킬러는 공식적으로 신원이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2004년 샌프란시스코 경찰국이 수사를 공식 종결했고, 가장 유력한 용의자였던 아서 리 앨런은 2002년에 사망했습니다. DNA 검사에서 일치 결과가 나오지 않아 법적으로는 끝내 기소되지 못했습니다. 혹시 실제 사건이 궁금하신 분이라면 영화보다 더 허무한 현실을 마주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Q. 조디악 영화가 너무 길고 지루하다는 평이 있던데, 볼 만한가요?
A. 저도 처음에는 중반부에 잠깐 집중력이 흐트러졌습니다. 인물이 많고 사건 진행이 빠르지 않기 때문에 자극적인 전개를 원하는 분께는 답답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다만 후반부까지 버티면 그 느린 전개가 의도된 연출이었음을 알게 되고, 전체가 하나의 감각으로 연결됩니다. 160분이 아깝지 않은 경험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Q. 로버트 그레이스미스는 실제 인물인가요?
A. 네, 실존 인물입니다.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에서 만화가로 일하다 조디악 사건에 집착하게 된 그는 실제로 조디악 관련 책을 출판했고, 이 영화는 그 책을 바탕으로 제작됐습니다. 영화에서 그려지는 집착과 가족의 위기, 용의자 추적 과정은 실제 그의 경험을 상당 부분 반영한 것입니다.
Q. 영화에서 조디악의 암호는 실제로 해독됐나요?
A. 조디악이 보낸 암호문 중 일부는 해독됐지만, 전부가 풀린 건 아닙니다. 첫 번째 암호는 아마추어 부부에 의해 해독됐고, 나머지 암호 중 하나는 무려 51년 만인 2020년에야 해독됐습니다. 암호 해독(Cryptanalysis), 즉 암호화된 정보를 키 없이 해독하는 기술이 발전하면서 가능해진 일로, 사건이 공식 종결된 이후에도 민간 연구가 계속됐습니다.
영화 '조디악'을 보고 나서 저는 "세상에는 끝까지 답을 알 수 없는 일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다시 생각하게 됐습니다. 로버트 그레이스미스의 집착이 이상해 보이면서도 이해가 된 건, 그 마음 어딘가에 저도 공감했기 때문일 겁니다. "나라면 그 상황에서 진실을 끝까지 쫓았을까, 아니면 어느 지점에서 포기했을까?" 그 질문 하나를 오래 붙들게 만드는 영화라면, 충분히 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 참고: https://youtu.be/R5DKGsJ8IGg?si=SnxexB8x6oqyfc6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