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쩔 수가 없다 리뷰 총정리 (구조조정, 자기합리화, 이병헌)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단종의 시신을 거두는 마지막 장면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아서였습니다. 직접 겪어보니 이런 영화가 주는 여운은 꽤 오래갑니다. 결국 집에 돌아와 밤늦게까지 조선 역사 자료를 뒤적이기 시작했고, 영화 속 엄흥도라는 인물이 실제로는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따라가게 됐습니다.
영화를 보기 전까지 솔직히 엄흥도라는 이름을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단종이나 사육신(死六臣)은 귀에 익은 이름이었지만, 엄흥도는 조선사를 깊이 공부하지 않으면 스쳐 지나치기 쉬운 인물입니다. 사육신이란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 세조에게 처형된 여섯 충신을 가리키는데, 엄흥도는 그 여섯 명 안에도 들지 못하는, 어떻게 보면 역사의 그늘 속에 조용히 숨어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남긴 말이 바로 위선피와 오소감심(爲善被禍 吾所甘心)입니다. 이 말은 "옳은 일을 하다 화를 당하더라도 내가 달게 받겠다"는 뜻으로, 단종의 시신을 거두며 했다고 전해지는 말입니다. 세조의 엄명은 단호했습니다. 시신을 거두는 자는 삼족(三族)을 멸하겠다는 것이었는데, 삼족이란 부계, 모계, 처가 쪽 일가 모두를 뜻하는 극형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엄흥도는 아들들을 데리고 직접 장례용품을 마련해 시신을 수습했습니다.
영화는 그 이전의 시간을 상상력으로 채웠는데, 그 접근 방식이 개인적으로는 꽤 설득력 있게 다가왔습니다. 두 사람이 밥을 나눠 먹고 짧은 대화를 나누는 장면들, 화려한 궁중 장면 하나 없이 이어지는 그 평범한 눈빛들이 오히려 더 오래 기억에 남았습니다. 감독이 역사의 빈칸을 영화적으로 해석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다시 떠올려보니, 그 빈칸이 오히려 이 영화의 가장 큰 힘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엄흥도가 시신을 거두던 날은 매서운 눈보라가 몰아쳤고, 단종을 묻을 맨땅을 도무지 찾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때 산속에 앉아 있던 노루 한 마리가 놀라 달아났고, 그 자리에만 눈이 녹아 맨땅이 드러났습니다. 엄흥도는 그곳이 명당이라 판단하고 단종의 시신을 매장했는데, 훗날 숙종 때 단종이 복권(復權)되어 왕릉으로 이장할 당시 최고의 지관이 그 자리를 두고 "천하의 명당"이라 평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복권이란 빼앗겼던 지위나 명예가 공식적으로 회복되는 것을 말합니다.
영화는 엄흥도가 시신을 거두는 장면으로 끝을 맺습니다. 그런데 제가 가장 궁금했던 건 그 이후였습니다. 그 선택이 엄흥도 본인과 가족들에게는 실제로 어떤 삶의 변화로 이어졌을까 하는 점이었습니다.
단종의 시신과 엄흥도 일가가 하루아침에 사라지자 관에서는 그 행방을 추적하기 시작했습니다. 놀라운 것은 마을 사람들 모두가 짐작하고 있었음에도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결국 관에서는 끝내 일가를 찾지 못했고, 엄흥도와 후손들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먼 곳으로 이주하며 온갖 고난을 감내하며 살아갔습니다.
그렇게 약 200년이 흐른 1668년, 엄흥도는 복호(復戶)됩니다. 복호란 관에 등록된 호적을 회복하는 것으로, 쉽게 말해 국가 공식 기록에서 지워졌던 존재가 다시 복원되는 것입니다. 이후 엄흥도의 후손들은 송시열의 건의로 벼슬에 오를 자격을 다시 얻게 됩니다. 영조 34년인 1758년에는 영조가 친히 제문을 내리며 사육신과 함께 제향(祭享)을 올리도록 명했고, 고종 때는 충위공(忠毅公)이라는 시호(諡號)를 받으며 정승급 관직까지 추증되었습니다. 시호란 사후에 왕이 신하의 덕행을 기려 내리는 칭호입니다.
현재 강원도 영월에 위치한 장릉(莊陵), 즉 단종의 왕릉 안에는 엄흥도를 기리는 정려각(旌閭閣)이 함께 세워져 있습니다. 정려각이란 충신이나 열녀를 기리기 위해 나라에서 세워주는 기념 건축물을 말하는데, 충신을 기리는 정려각이 왕릉 안에 함께 세워진 것은 조선 역사에서도 매우 이례적인 경우라고 합니다. (출처: 문화재청 조선왕릉)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두 사람이 역사 속에서 얼마나 각별한 관계로 기억되고 있는지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엄흥도의 선택이 어떤 변화를 가져왔냐고 묻는다면, 당장의 삶은 완전히 무너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200년이 지나 그 이름이 다시 불렸고, 결국 왕보다 오래 기억되는 충신이 됐습니다. 그게 제가 영화를 보고 나서 더 오래 생각하게 된 부분이었습니다.
영화를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는 분들이라면 어디까지가 역사 기록이고 어디부터가 창작인지 다소 헷갈릴 수 있습니다. 저도 처음엔 그랬습니다. 영화 속 엄흥도와 단종의 일상적인 교류 장면들은 실제 사료에는 존재하지 않는, 감독이 만들어낸 이야기입니다. 다만 단종의 유배 생활에 공료(供料), 즉 일상을 돌보는 사람들이 동행했다는 역사적 기록은 실재합니다. 영화는 그 기록을 바탕으로 상상의 공간을 넓혔습니다.
이 영화에서 또 한 명 눈에 띄는 인물이 한명회(韓明澮)입니다. 수양대군의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설계한 핵심 인물로, 계유정난이란 1453년 수양대군이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일으킨 쿠데타를 뜻합니다. 한명회는 이후 영의정까지 오르며 두 왕의 장인이 되는 전무후무한 권세를 누렸지만, 사후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했습니다. 부관참시란 이미 죽은 사람의 관을 파내어 시신의 목을 베는 극형으로, 살아서 누린 권세만큼이나 비참한 결말이었습니다.
엄흥도와 한명회의 삶은 극명하게 대비됩니다. 아래는 두 인물의 선택과 그 결과를 정리한 것입니다.
이 세 인물의 이야기를 나란히 놓고 보니, 이 영화가 단종의 비극을 다루면서도 결국 말하고 싶었던 것은 다른 무언가였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권력 앞에서 각자가 내린 선택, 그리고 그 선택이 수백 년에 걸쳐 어떻게 기억되는지에 대한 이야기 말입니다. 조선왕조실록을 포함한 당대 기록들을 살펴보면(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엄흥도에 대한 직접적인 기술은 많지 않지만, 그 공백이 오히려 이 인물을 더 크게 느끼게 만드는 이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왕과 사는 남자는 단종의 비극을 정면으로 다루기보다, 그 비극 옆에 서 있던 한 평범한 백성의 선택을 더 크게 비춥니다. 역사에 몇 줄만 남은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아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냈다는 점이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습니다. 영화를 보고 나서 조선사 자료를 뒤적이게 됐고, 그 과정에서 엄흥도의 삶이 오히려 더 선명하게 느껴졌습니다. 단종의 마지막이 궁금하신 분이라면, 영화를 보기 전에 먼저 영월 장릉을 찾아보시는 것도 좋은 출발점이 될 것 같습니다.
--- 참고: https://youtu.be/fm6Ko8doGBc?si=C9JboniaVMYTNZkO